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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 작성자
    최지훈
    작성일
    2004년 9월 17일
    조회수
    1717
  • 첨부파일
그대의 눈에 눈물이 맺히네요.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뿌리가 드러난 저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그대 모습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더 슬프답니다.

언젠가 제 가지를 부러뜨려 칼싸움을 하던 아이들을 타이르던 당신 모습이 생각나네요. 그 때 당신은 나무에게도 감정이 있다고 하셨지요. 맞습니다. 제게도 감정이 있답니다.

인간처럼 보고 듣는 능력은 없지만 저희에게도 촉각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누군가 살그머니 다가와 제게 몸을 기댈 때 저는 편안한 마음이 들지만, 후다닥 달려와 가지를 뿌러뜨리거나 아저씨들이 저를 베려고 할 때는 온 몸이 떨린답니다.

텃밭이 없어지는 것이 안쓰러워 공사장 근처를 서성이던 할머니의 모습도 떠오르네요. 저도 마음이 슬펐어요. 텃밭과 저희는 좋은 친구였거든요.

텃밭의 작물들은 흙을 더욱 찰지게 해 준답니다. 지렁이를 비롯한 많은 미생물들이 그 덕에 살고 있는 셈이죠. 제가 뿌리를 뻗고 편안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은 다 텃밭덕분이었죠.

이제 그 텃밭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얼마후면 아스팔트로 말끔하게 단장이 되겠지요. 하지만 저는 깜빡 한 눈을 파는 바람에 잘가라는 말 한마디도 못해줬어요. 제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 있는 힘껏 씨앗을 공중으로 날리고 있었거든요. 다음날 친구에게 물어보았어요. 텃밭 친구들은 어떻게 되었냐구요? 친구는 아무 말이 없었어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데요.

포크레인은 밀고 들어오고, 텃밭을 가꾸던 할머니들은 말릴 엄두도 못내고, 작물들은 소리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픽픽 쓰러지고, 땅속의 미생물들은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죽어버렸데요. 죽어버렸데요.

그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우리 식물들은 죽기 직전에 자기의 씨앗을 어딘가에 뿌려놓는답니다. 언젠가 그 씨앗은 돌고 돌아 또다른 싹을 틔울테니까요.

사실은 저도 이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당신이 나무 주변의 텃밭이 사라지고 흙이 뭉게지면 나무도 죽는다고 공사장 아저씨도 설득하고 구청에 민원도 넣으셨다는 거 다 알아요. 텃밭이 없어지고 나서 식당 아줌마랑 할머니들이 아저씨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거든요.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말이죠.

하지만 공사장 아저씨들도 저를 살려보려고 애를 쓰셨지만 할 수 없네요. 이렇게 뿌리가 다 드러나 버렸으니 말이예요. 공무원 아저씨는 저를 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요. 그럴려면 미리 저를 옮겨 놓고 도로를 놓았어야 했는데 ... ...

식당 아줌마가 또 그러시더군요. 고작 2미터 넓이로 도로를 확장하는데도 이렇게 흙과 나무를 뭉게는데 큰 사업은 오죽하겠냐구요. 그러게요. 저 멀리 북한산에 있는 나무들도 이미 벌써 큰 도로를 놓는다고 베어져 없어졌고, 천성산에 있는 야생식물들도 하루하루를 가슴졸이며 지내고 있다는군요.

어떻게 아느냐구요? 저희 나무들은 모두가 한 가족이랍니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같은 종의 나무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어볼 수 있답니다. 세계 그 어느 곳에 있더라도 말이죠.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그만 우세요.

제가 죽는다고해도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늘 저를 보면서 쓰다듬어 주시고 귀를 제 몸에 대고 심장소리를 들으시던 당신을 잊지 못할 거예요. 제 몸 하나 사라진다고 해도 언젠가 저는 또다른 모습으로 당신앞에 나타날 거예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사실을 인간들은 몰라요. 아니, 예전의 인간들은 그렇지 않았데요. 먼 먼 옛날의 나무할아버지께서 제게 말해주셨어요. 그 때는 나무가 인간사회의 기둥이었데요. 마을어귀에는 언제나 나무를 심어놓고 저희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고는 힘들 때나 기쁜 일이 있을 때면 저희 앞에 모이셨다고 하더라구요. 그럼 나무들은 더 힘을 내서 여름에는 그늘도 많이 만들어주고, 가을에는 열매도 풍성하게 맺어주고 그랬데요.

하지만 언제부턴가 저희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어요. 도로를 놓는데 방해가 된다고 잘리고, 댐을 짓는다고 베어 없어지고, 공장을 짓는다고 뭉게져 버리고, 아파트를 짓는다고 마구 헐리고 말았어요.

인간들은 저희가 없어도 잘 살수 있다고 생각하나봐요. 유감스럽지만 저희는 인간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는데, 도리어 요즘같으면 인간들이 좀 사라져주었으면 저희들이 더 살만할 텐데. 인간들은 왜 그걸 모르죠. 식물이 살 수 없는 곳에서는 인간들도 살 수 없다는 것을 말이죠.

아, 말이 길어졌네요. 이런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인간들중에는 아저씨같은 분들도 계시는데 말이죠. 저는 이제 고목으로 돌아갑니다. 나무로서 생을 마감하는 셈이죠.

그렇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고목은 고목대로 다 쓸모가 있답니다. 미생물이나 곤충들이 저를 벗삼아 집을 짓거든요. 후후후 그들을 위한 초고층 아파트가 되는 거네요. 저도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겠지요. 인간들도 마찬가지구요. 그리고 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거예요. 인간도 또 다시 세상에 나오겠지요. 이렇게 생명은 돌고 돌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답니다. 그 연결의 고리가 끝나는 날, 생명도 영원히 사라지겠지요.

제가 없어졌다고 서운해하실 아저씨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지만 잠시동안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이제 그만 안녕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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